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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V VIP의 영화 리뷰

영화 [위키드] 그들의 우정을 잘 모르겠다 (스포)

by 이트리(yttree) 2024. 12. 11.

언니의 입김으로 최근에 위키드를 봤다. 뮤지컬 위키드도 언니가 예매했으나 예매당일 건강이 좋지 못해 나에게 양도해서 운 좋게 대배우 정선아와 옥주현의 위키드 뮤지컬을 보기도 했었다. 당시 배우들의 연기가 소름 끼치게  뛰어나 정선아/옥주현 보유국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 차기도 했었다. 솔직히 위키드 스토리 안에서 글린다와 엘파바의 우정에 감동을 받진 못했어서 영화까지 봐야 되는가 하는 의구심도 있었다. 언니가 듣기로는 영화로 보면 서사가 더 이해가 되게끔 연출을 했다는 평이 있다기에 영화에서 보면 좀 더 그들의 서사가 이해가 잘 될까 싶어 호기심반 의구심반으로 영화관을 찾아갔다.
 
아리아나 그란데가 서쪽 마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씬으로 시작했다. 뮤지컬에서도 첫 부분에 정선아가 씁쓸하고 구슬픈 톤으로 공중에서 내려와 소식을 알렸던 장면이 떠오르고 반가웠다. 방울 안에서 둥둥 날아와 등장해 방울을 뾱 터뜨리는 능청스러운 마법이 무척글린다스럽다고 생각했다. 뮤지컬에서 볼 수 없었던 마법의 연출이 재미있었다. 
볏짚으로 만든 서쪽 마녀를 화형 하는 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긴 글린다의 묘한 표정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아직 보여주지 못한 숨겨진 이야기들이 많다는 것을 표정만으로 말해준다. 이 영화로 인해 아리아나 그란데는 연기도 Grand급이었음을 재발견하게 됐다.
 
영화 위키드에서 보여주는 그린컬러의 주인공답게 흑인인 신시아 에리보가 엘파바를 맡게 된 것은 신의 한 수였던 것 같다.
마법을 배우러 입학했으면서 초록색의 피부가 뭐 놀랄 일이라고 전교생이 엘파바를 보며 경악을 했는지 이해하기는 매우 힘들었으나 위키드가 담고 있던 다양성에 관한 메시지를 흑인의 주인공으로써 보여주며 인종차별과 같은 문제도 암시하는 듯해 좋았던 것 같다.
거의 엘파바를 노예취급하고 구석탱이 공간이 네 방이라며 내주는 글린다의 모습도 백인우월주의의 끝판왕으로 보이며 기존에 뮤지컬로는 잘 느끼지 못했던 흑인/백인 갈등의 구도도 느껴지고 긴장감이 더해진다. 
 
옥주현의 엘파바는 뭔가 화끈하고 독특한 아웃사이더의 느낌이 있었는데 신시아의 엘파바는 어쩐지 침착하고 너디하며 지적인 분위기가 풍겨 새로웠다. 아리아나 그란데의 글린다는 아무도 대체할 수도 없는 순도 200% 글린다였다. 심지어 그란데, 글린다 자음도 같다. 연예인으로서의 아리아나 그란데는 떠오르지도 않았다.
 
입학 첫날부터 학교 기물을 내동댕이치며 파손시키는 마법을 보여준 엘파바 때문에 학기 초 인생이 망했다는 동생 네사는 이해하기 힘든 얄미운 캐릭터였다. 장애가 있는 동생 입장이면 오히려 힘센 언니가 무섭지 않았을까? 나 같으면 험한 말 함부로 하지 않고 언니 말 잘 들었을 것 같은데..
함부로 엘파바를 천대하는 학생들도 대단한 깡이다. 누군가 볼드모트급 마법을 보여줬으면 경외심을 보이는 게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 엘파바가 호그와트에 갔으면 슬리데린에서 추앙받는 대마녀 일진이 돼서 말포이네 같은 무리들이 매일 담뱃불 붙여주고 빵셔틀을 해줬을 것이다.
 
영화에서는 뮤지컬이 보여주지 못했던 학교의 풍경이나 모습을 보기 좋게 담고, 그래픽이지만 염소교수를 진짜 동물의 모습으로 볼 수 있어서 귀여웠다. 동물 하니 생각났는데 어떻게 마녀영화에서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등장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말을 하자 언니는 큰 고양잇과 동물은 나오잖냐며 시답잖은 반박을 했다.) 영드 꼴찌마녀 밀드레드에서는 학교 입학 시 자신의 고양이 한 마리를 꼭 선택하는 게 필수 과정이니 냥마력이 아쉬운 사람들은 밀드레드를 꼭 보자. 밀드레드가 애들 드라마 같아도 위키드보다 우정과 의리가 진하고 매 시즌 울면서 봤을 만큼 감동적이다.
 
위키드의 쉬즈도 명색이 마법학교인데 쉬즈만의 개성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여줬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많은 마녀마법사 서사들이 있는데 쉬즈의 교장은 어떤 마법을 부리며, 이곳 학생들은 어떤 마법을 연습하고 배우는지 약간의 디테일이 더해졌다면 엘파바가 어떻게 우수학생으로 인정받고 성장했는지 더 와닿을뿐더러, 메인 서사가 힘을 받고 더 설득력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입학하자마자 너는 내 거야 하며 교장이 쑝 엘파바를 데려가버리니 첫 장면부터 교장의 품위나 자질에 신뢰가 가지 않았다. 양자경이 중반부 한참 지나 딱 1초, 잠시 비 오는 날씨를 바꿔주는데, 초장부터 마법 좀 써주며 시작했으면 학교의 위용을 더 뽐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고 다소 아쉽다. 
 
그들의 우정에 공감을 못하겠다
엘파바와 글린다, 그들이 친구가 된 시작점이 못 미덥다. 글린다의 파티에 교장이 학부모처럼 몸소 찾아와 딱딱하게 지팡이를 건네주고 '너는 재능이 없지만 엘파바 덕에 너도 개인교습받게 되었어. 저기 엘파바도 온 것 같던데?'라고 거의 으르렁거리며 말을 하는데 그 말을 들은 어떤 학생이 엘파바를 챙기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상황에서 글린다가 엘파바에게 협조적으로 굴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 
정말 미안하고 친구가 되고자 손을 뻗는다는 느낌보다는 교수의 압박으로 인해 엘파바와 친구가 되어주고 챙겨줘야만 하는 필연적인 상황이 더 크게 느껴졌다. 이 장면을 보며, '역시 대척점에 있는 안 좋은 사이도 서로에게 비즈니스적인 이득을 주면 친구가 될 수 있구나. 누군가가 악의적으로 이상한 선물을 준들 감사하게 여기고 감사를 표현하면 결국에는 빌런도 뉘우치고 친구가 되는구나, 역시 감사하는 태도는 인생에서 중요해.' 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 옆에서 언니는 글린다의 우정의 닭춤을 보며 눈물을 터뜨리고 있어 매우 놀랐다. 어떤 부분이 울만큼 감동적이었던 걸까? 비웃고 욕하던 주변 학생들 모두 글린다가 따라 갑자기 태세전환해서 닭춤을 추는 모습들이 지독하게 혐오스러웠다.
 
결정적으로 엘파바는 모두를 잠재우고 남의 남친을 쏠랑 빼가서 아기호랑이 구출을 빙자한 사심 어린 데이트를 즐기고 친구 남친의 얼굴을 쓰다듬기까지 한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글린다는 에메랄드 시티로 가는 엘파바를 기차까지 마중 나와 마지막까지 달려 나가 인사를 하는데 엘파바는 양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분개했던 순간이었다. 글린다가 그날의 피에로 사건을 알았더라면 에메랄드 시티로 따라가 이런저런 개고생을 하고 도피할 때 과연 엘파바의 손을 붙잡고 중력을 넘는 노래를 불러재끼며 뛰어내릴 생각을 했을까? 이런 전말을 다 지켜본 제삼자인 관객의 시선에서는 그들이 우정을 노래하든 말든 그들에 마음에 대한 진정성에 이미 금이 갔기 때문에 엘파바만 괘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글린다는 애초에 마을 사람들이 엘파바와 친구였냐 물었을 때 그냥 아는 사이였다고만 언급하며 손절하지 않았는가? 그냥 지인이라면 너희들의 중력을 넘는 사연은 어떻게 된 것이지? 
 엘파바가 오즈로부터 탈출하는 순간 마지막까지도 글린다는 '너의 능력이 그렇게 대단하지 않을 수 있잖아, ' 라며 현실에 안주하도록 친구의 능력을 후려치는데, 친구로서 걱정하는 말이라기보다 오즈의 총애를 받고자 설득하기 위해 뱉은 말들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내 눈에는 엘파바와의 관계성이 그저 글린다의 많은 사회생활 중 하나의 관계인 것으로 보였는데 '중력을 넘어서'를 그들이 같이 마주 보며 부를 때는 '너희들이 그 정도였어?'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이 둘이 그렇게 친했나 싶어 당황스러웠다. 
 
또한 파퓰러 송은 누군가의 개성을 함부로 부정하고 남의 스타일링을 개조시키려 든다는 점에서 매우 무례한 송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글린다는 백치미 캐릭터답게 순수하게 도와준다고 생각하고 한 짓이므로 사랑스럽게도 보이긴 했으나 친구를 진정으로 위하는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엘파바에게 핑크패치를 하는데 보면서 내 취향이 아니라 너무 괴로웠다. 오히려 검은 원뿔 모자가 엘파바의 취향저격이었을 텐데.. 글린다가 마지막에 엘파바에게 준 분홍리본은 또 진한 초록색과 안 어울리게 너무 연한 핑크라 또 짜쳤다. 진초록과 좀 잘 어울리는 빈티지한 핑크색을 고르지..
그래도 글린다가 중간중간 머리를 흔들어 재끼는 모션이나 거울을 보고 자기 자신에게 취한 모습 연기가 너무 능청스러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 깜찍한 아리아나가 아니었다면 조금 화가 났을지도.
 
글린다 캐릭터에 대한 감상
글린다는 흔한 여주 로맨스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평범 찐따 여주에게 모든 요소에서 패배하는 라이벌처럼 소모되는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재능이 없어 교장의 멸시를 받고, 남친의 마음도 빼앗기고, 엘파바는 독립적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데 권력자들의 시녀가 된 듯 끝까지 엘파바를 후려치며 설득하기까지, 총체적으로 안쓰럽다. 글린다를 통해 귀여운 백치미를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라면 성공이겠지만 주연으로서 지지하고 싶은 다른 면모나 매력은 잘 모르겠고 조연 같은 느낌이 크다. 이 영화를 보는 백인 여자들은 어떤 마음이었을지 궁금해진다. 글린다도 스토리 후반부에서 오즈들을 타도한다고 하는데 파트 2를 보면 좀 생각이 달라질까?(뮤지컬 봤으나 기억 안 남) 사악한 서쪽마녀로 마녀사냥당한 엘파바도 안타깝지만 극에서의 글린다의 존재감도 마음 쓰이고 불쌍하다. 
 
그래도 스토리가 어쨌건 극단적으로 다른 여자 둘을 붙여놨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덕분에 닭살스럽지만 '중력을 넘어서'같이 환상적인 노래를 들을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곰곰이 글린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면, 자기애가 넘치고, 현실적인 간잽이처럼 권력에 아부하고, 매사 엉뚱한 드립을 가볍게 던지고, 이제 보니 적극적으로 생각 없는 말을 열심히 내뱉음으로써 깃털같이 가볍고 긴장을 풀어주는 편안한 역할을 충실히 다하고 있지 않았던가? 엘파바가 비범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면 글린다는 평범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고심하며 글을 쓰다 보니 글린다라는 캐릭터가 더 이상 불쌍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글린다는 평범하고 낙천적인 길을 걸어가며 그녀대로 행복할 것이다.
 
서쪽마녀에 대한 재해석은 겁쟁이 오즈 서사와 맞물려서 역시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된다. 다시 오즈의 마법사 동화를 다시 읽고 싶다.
아씨오 빗자루를 불러 빗자루 타고 망토를 휘날리며 날아가는 엘파바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아이맥스로 봐도 시원했을 것 같다. 
앞서 독설을 많이 했지만 물론 재밌었으므로 내년에 나올 파트 2도 꼭 볼 것이다. 엘파바가 흑화해서 무서운 노래를 한 곡 부를 텐데 그 장면이 클라이막스가 될 것 같고 몹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