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 리뷰

책 리뷰,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 이해할 수 없는 삶과 죽음을 수용하도록 위로하는 드라마

by 이트리(yttree) 2024. 12. 7.

최근 시각장애인에 대한 묘사를 한 소설이 궁금해서 카카오톡에 AskUp에게 물어봤더니 열댓 권 정도를 내게 알려줬었다.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은 그 목록 중에 하나였는데 웃긴 사실은 이 소설에 시각장애인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
아무래도 주인공이 다리가 불편하니 장애인으로 인지해서 알려준 것 같은데 거짓말 친 AI가 약간 괘씸하면서도 덕분에 재밌는 작품을 알게 되었으니 고맙기도 하다. 
 
소설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내용은 이렇다.
놀이공원 정비를 하는 에드워드는 위험에 처한 어린 소녀를 구하려다 놀이기구에 깔려 소설 초반부터 죽는다. 믿을 수 없지만 사후 세계(?)에서 눈을 뜬 에드워드는 모두 그의 생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다섯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을 통해 아버지의 죽음이나 자신의 다리 부상에 대한 전말을 알게 되며 죽지 않았으면 몰랐을 진실을 알게 된다. 결국 에드워드는 맺혔던 응어리를 풀고 자기만의 천국을 가게 된다.
 
2003년 옛날(?)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주인공이 허무하게 죽어버리며 독자의 허를 찌른다. 애니메이션 소울이 연상되기도 하는데 소울의 제작진은 이 소설에서 영감을 받지 않았을까?
독자는 천국에 온 뒤 무슨 상황인지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에드워드와 똑같은 입장에서 시작한다. 읽다 보면 주인공 바로 옆에서 죽음을 경험하고 사후 세계를 함께 지켜보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에드워드는 놀이공원에 정비사로 갇혀있을 수밖에 없는 자신 인생의 한계와 매너리즘을 느낀다. 다양한 것을 해보지 못한 에드워드는 자신의 허무한 죽음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이 그 소녀를 구하고 죽었는지, 구하지 못했는지'에 집착하며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물어보고 다닌다.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 마음이 너무 절절해서, 이미 내가 죽은 것 마냥 사람 그 슬픔과 미련을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었다.  
 
에드워드는 다리 부상으로 인해 극심한 정신적인 고통을 받았으며 어딘가로 떠나 다른 곳에서 일하지도 못하고 그토록 소통이 안되던 아버지가 일하던 곳에서 아버지와 똑같은 일을 하다 생을 마감한다. 비록 죽은 뒤 나름의 해명을 듣고 치유가 되었지만 죽고 나서야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이 좀 짠하다. 에드워드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우리네 평범한 직장인들에게도 큰 울림을 주고 위로를 줄 수 있는 소설이란 생각이 든다.
 
 나는 이런 희망편도 꿈꿨는데, 에드워드가 식물인간이었다가 아직 살 운명이니 다시 돌아가라는 지령을 받고 결국에는 병원에서 다시 눈을 뜨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결말은 그렇지 못했고, 다른 의미로 잔혹했다. 이 소설의 본질은 우리는 모두 엮여있고, 어떤 죽음도 의미 없지 않으며 죽음이 절망적인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하는 데 있다고 본다. 그래서 마치 할리우드 결말 같은 엔딩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해피엔딩으로 그려질 수 없는 것이다.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매력의 책
이 소설은 제목을 처음 봤을 때는 왠지 하이얀 천국에서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는 왠지 진부한 이미지가 떠오르고 별로 기대되지 않았다.
막상 소설을 읽으니 생각보다 어드벤쳐 게임인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나 '비포 더 스톰'을 플레이하는 것처럼 아련하면서도 긴장감이 넘쳤다. 오래전에 영화로도 만들었다던데 영화를 보진 않았지만 지금이라도 게임으로 만들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계속 오가며 구성된다. 게임으로 만들면 에드워드의 애틋한 어린 시절부터 전쟁에 참여한 군인시절, 죽은 뒤 다섯 사람의 천국을 멀티버스처럼 넘나들기 때문에 스펙타클한 재미가 있었을 것 같고 플레이어가 어떤 식으로 주변과 상호작용하며 플레이하게 될지도 눈에 선하다. 
 과거 회상장면은 감동을 쥐어짜며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고 차분한 분위기로 묘사되어 있어 오히려 읽으면서 가슴 한 구석이 철렁 내려앉고 목이 메일 정도였다.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인데도 내 과거를 보듯이 마음이 미어졌다. 어릴 때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읽어보긴 했지만 미치 앨봄이 이렇게 글을 잘 쓰는 사람인 줄은 몰랐었다. 이 참에 잘 기억나지 않는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도 좀 읽어보려고 한다.
 
제일 인상적이었던 부분
에드워드가 중병을 앓고 있는 배우자 마거릿을 차에 태우고 병원에 데려가는 장면이 잠깐 지나가는데, 사방이 조용하지만 숨도 못 쉴 듯한 긴장감과 절박한 공기가 다 느껴진다. 내가 그 차에 같이 타고 있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천국에 대한 발상의 전환
이 소설에서는 천국에 대한 상상력과 반전을 볼 수 있다. 부하들을 위해 희생한 대위는 자기가 죽었던 곳에 머물며 바뀌어가는 일상을 지켜보고 싶다고 했다. 그곳이 그에겐 천국이라 한다. 두 번째 만난 얼굴이 파란 남자는 자신이 고통스럽게 일했던 서커스단의 풍경이 있는 마을이 천국이라고 한다. 세 번째 만난 루비 할머니는 놀이공원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하루아침에 망했는데, 자신의 이름을 딴 루비 놀이공원에서 일하다 죽은 노동자들을 위한 식당을 만들었고 그곳이 천국이란다. 그들에게 제일 고통을 주었을 그 장소가 그들의 천국이 되었다.
고통스럽지만 그 삶이 사실 그들에게 제일 행복한 순간이었고 의미 있고 값진 순간이었다는 메시지일까?
이거 천국라이팅 아닌가 싶기도 하고.. 천국에 대해 큰 기대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이 책을 싫어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에드워드의 천국에서는 자신이 정비한 덕분에 행복하게 뛰어노는 아이들로 놀이공원이 가득 차고 관람차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아름다운 모습의 아내를 만나게 되는데 반짝거리는 놀이공원 야경이 그려지며 꽤 낭만적이었다. 주인공이라서 그런지 비교적 다른 인물들의 천국보다는 아름다웠기 때문에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눈물 줄줄 흘리며 읽었지만 그래도 드는 의문점
에드워드의 아버지 친구는 에드워드의 어머니를 강간하려 했다. 천국에서 만난 루비 할머니는 에드워드에게 그 자초지종을 설명해 준다.
에드워드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내를 성폭행하는 상황을 맞닥뜨린 후 그 친구를 거의 죽일 듯이 쫓아갔지만 그 친구는 전에 에드워드의 아버지가 생계를 잇는데 도움을 줬으므로 강물에 뛰어든 친구를 쫓아 구해주고 용서했다고 설명을 해주는데.. 루비 할매는 아내의 의사는 안중에도 없이 음주로 인한 심신 미약 상태를 인정해 주며 교묘하게 성폭행범도 잠시 실수를 저지른 인간 취급을 해준다. 
사실 관계를 다시 따져보면 에드워드 아빠는 자기 아내를 성폭행하려든 친구가 강물에 빠져 그를 구해주다가 폐렴에 걸려 사망했다.
혹시 작가는 오히려 저런 에드워드아빠 친구 같은 쓰레기잡놈은 구해줘 봤자 너만 죽으니 구해줄 필요도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나?
 
에드워드의 아버지는 가죽벨트로 자녀들을 때렸던 가정폭력범이었다. 천국에서 만난 루비 할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는 설명을 해줬으나 아버지가 에드워드한테 폭력을 행사하고 가혹했던 이유는 설명해주지 않았다.  또, 에드워드가 전쟁에서 살아 돌아와 다리 부상으로 인해 침울하게 집에 은신하던 때가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당장 일어나 일이나 하라며 아들을 폭행하려 드는 장면이 있다.
솔직히 여전히 용서나 되지 않는 대목이고 읽으면서 오은영 박사님이 화면 멈추고 '잠시만요.' 정색하시며 개입하시기를 간절히 바랬다. 
루비 할머니가 신은 아니니 모든 걸 설명해 줄 수는 없었겠지만 나는 아직 납득이 안 됐는데 주인공은 모든 의문과 한이 풀리고 완전히 치유받은 사람이 된 듯 굴어서 공감하기 어려웠다. 
 
주인공은 천국까지 가서도 가스라이팅 당한 게 아닐까?
기껏 남을 위해 온몸을 던져 죽었더니 천국에서 만난 자들은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서 죽었습니까? 유감이네요, 하지만 당신도 누군가를 죽였답니다!'라는 식의 소리를 들려준다.(이런 말투로 말한 건 아니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는데 나 때문에 죽은 사람들에 대한 정보들을 거의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설명을 들으며 죽어서까지 죄책감과 슬픔을 느끼게 하는데 남을 위해 희생해 봤자 별로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 얼핏 들기도 한다. 그래도 에드워드는 '나도 누군가를 죽을 빌미를 제공했으니 나도 남을 위해 죽었지만 쌤쌤이야.' 하면서 자기 위로는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나마 위안을 주는 점은 에드워드가 여든이 넘도록 살았다는 것이다. 처음에 주인공이 정비도 하고 거동을 잘하는 것 같길래 한 40-50대 된 줄 알았는데 후반부에 나이 묘사가 나오고 나서야 알고 보니 그가 이미 할아버지였음을 깨달았다. 다리가 다쳤는데도 여든이 넘도록 정비를 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정비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무탈하게 잘 살았다고 본다. 
 
소설은 이런 교훈들을 주려고 했던 것 같다. '당신의 현재 일상이 최고의 천국이다, 당신은 당신이 해야만 하는 꼭 필요한 일을 하고 있으며 당신이 모르는 일도 세상에 많이 벌어지고 있으니 이해하기 힘든 일에 잠식당하지 말고 남 원망하지 말고 행복하게 살아라.'
영화 소울 주인공도 그토록 원하던 클럽에서 공연을 한다는 목표를 이룬 뒤 허무함을 느끼고, 죽고 나서야 결국에는 목표보다는 과정 중심의, 살아가는 것 자체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
이런 류의 이야기들을 접할 때면 감동적이고 백번 공감을 한다. 나도 내 현재가 매우 소중하고 행복하다.
이런 소설들은 나와 같은 아등바등 사는 서민들이 그들의 세계와 공간을 받아들일 수 있게 도와준다. 대다수 사람들이 이런 평범한 사람들이니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은 놀랍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자신의 역할을 주어진 자리에서 착실히 하도록 격려하고 안주할 수 있게끔 위로하니 정부에서도 권장할 만한 소설인 것 같기도 하다.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우리가 더 욕심을 가지고 치열하게 노력하고 발버둥 치면 뭐 큰일이라도 나는 걸까? 
내 개인적인 다짐이지만 다음에는 현재의 순간을 소중히 하라는 이야기들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싶진 않다. 진부하더라도 다음번에는 모든 역경과 고난이 찾아와도 원하는 목표와 꿈을 부단히 열망하며 노력하고, 그 꿈이 퇴색될지언정 새로운 꿈을 다시 가지며, 실패해도 다양한 것에 도전하고 자신의 자리에 안주하지 않는 주인공의 서사를 보며 감동받고 싶다.